<인터뷰> 김재욱,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정말그들을만난것일까

2010년 PAPER 1월호에서 만난 인터뷰이는 김재욱입니다.
<나쁜남자>에서 김남길과 매력 대결을 펼치시고 계시죠.

<월간 PAPER> 정시우의 이달에 만난 사람
김재욱,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대개, 대중의 관심 안에 막 발을 들인 배우들은 그렇다. 인기를 타기 시작했을 때, 그 가속도를 이용해 더 멀리 나아가려 몸을 앞으로 쭉 뻗는다. 방금 얻은 인기가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도록, 앞만 보고 쉼 없이 내달린다. 쉽게 뒤 돌아 법도, 멈춰서는 법도 없다. 그랬다간 언제 어그러질지 모르는 게 인기니까. 김재욱이란 배우의 행보에 궁금증이 생긴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순정만화의 한 페이지에서 똑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커피프린스 1호점>의 '와플선기'로 도약하고,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속 ‘마성의 게이’로 인기를 얻은 김재욱의 이후 행보는 분명 여타의 배우들과는 달랐다. 그는 속도에 대한 강박대신 느림에 대한 여유를 선택했고, 당장 눈에 띌 수 있는 지름길 대신, 늦더라도 훗날 ‘자신에게 의미있었다’고 기억 될 수 있는 우회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이 궁금해 그를 잠시 불러 세웠다. 김재욱과의 인터뷰는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1월의 어는 날 밤, 그가 자주 간다는 로데오 거리의 작은 '바(bar)'에서 이루어졌다. 우리의 가는 시간에 맞춰 가게 문이 열렸기에, 가시지 않은 차가운 공기가 인터뷰 초반 함께 했다. 추위에 약한 나는 속으로 부들부들 떨었고, 김재욱 역시 추웠는지 두꺼운 외투로 무릎을 덮었다. 아마 대화가 빨리 무르익지 않았으면, 추위에 대한 체감온도와 체감시간은 더 낮고, 더 길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와의 대화는 아주 빠른 시간에 자연스러운 흐름을 형성했고, 그 흐름 속에서 추위는 빠르게 달아났다.

수염 기르셨네요?
기른 건 아니고, 안 자르다 보니.(웃음)

어울리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셨나요?
작년까지는 신나게 잘 놀았는데, 올해로 들어서자마자 일들이 계속 생기네요.

앨범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바쁜가 봐요.
네. 그것 때문에 요새 스케줄이 많아졌어요.

작년에 뭐 하고 있나 궁금하던 찰나에, ‘그랜드민트페스티벌(이하, GMF) 가이’로 활동하는 걸 봤어요. 저는 재욱씨가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출신인 걸 알고 있어서 굉장히 자연스럽게 다가왔는데, 놀라시는 분들도 많았을 것 같아요.
네. 아마 그랬을 거예요. 많은 분들이 저를 이름보다는 <커피프린스 1호점>(이하, <커프>)의 ‘와플선기’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의 ‘마성의 게이’ 같은 수식어로 많이 기억하세요. 개인적으로는 연기를 하기 전부터 해 왔던 게 음악이고 제일 처음으로 열중했던 것도 음악이지만, 그걸 대중들에게 보여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이들 낯설어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무슨무슨 출신 그런 거에 연연하기보다 보다, 뭐라 해야 하나? 아직 음악으로 뭘 해 놓은 게 없기 때문에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즐기면서 했던 것 같아요.

‘GMF’에서 밴드 ‘월러스(walrus)’의 보컬로 무대도 가지셨는데, 혹시 '월러스'의 전신이 '러닝하이'인가요?
(부끄러운 듯 웃으며) 그게요. 원래 ‘월러스’가 결성 된지는 횟수로 8,9년쯤 됐어요. 그런데 멤버들의 군대 문제 등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들이 자꾸 생기면서 활동을 많이 못 했어요. 그 사이에 밴드 이름도 굉장히 많이 바뀌었고요. 제가 학교 때문에 일을 쉬다가, 다시 모델 일을 시작할 때였어요. 회사에서 제가 밴드를 했다니까, “밴드 이름이 뭐냐, 프로필에 써야 한다” 그러시더라고요. 그 때 밴드 이름이 없을 때여서 “어? 밴드 이름이 없는데요?” 했더니 “아무거나 얘기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할까 하는데, 마침 제 아이폰에 ‘러닝하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흐르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러닝하이’에요, ‘러닝하이’로 해 주세요”라고 급조한 이름이 어떻게 알려지게 된 거죠. 나중에 멤버들에게 원망을 많이 받았어요. 이름이 그게 뭐냐고.(웃음)

여러 번 바뀌었다고 했는데, 그 외에 어떤 이름이 있었나요?
뭐가 있었지? ‘에스크’라는 이름도 있었고…… 말하기가 창피한데요?(웃음)

준비 중인 앨범이 궁금해요. 몇 곡 정도가 실리죠?
예상은 2,3곡 정도에요. 미니 앨범이라고 하기엔 작은데 또 싱글이라고 하기엔 조금 많죠. 계획대로라면 3월 중순에 나오는데,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네요.

어떤 느낌의 음악인가요?
멤버 각자가 곡을 하나씩 써서 그런지, 색깔이 굉장히 달라요. 어떤 곡은 되게 빈티지 하고, 어떤 곡은 되게 롹킹 하고. 기본적으로 영국 성향으로 가고 싶기는 한데, 딱히 레퍼런스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계열을 나누기가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아요.

평소에도 작곡 활동은 꾸준히 하셨나 봐요.
한번 할 때 집중하는 편이에요. 기타 치는 형 같은 경우에는 다작을 해서 몇 백곡 중에 한 두 곡을 뽑아내는 스타일이에요. 반면 저 같은 경우엔 다작을 하지는 않는데, 딱 집중해서 한 두 곡을 만드는 편이고요.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함께 밴드를 하니까, 장점만 살려서 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원론적인 질문을 하고 가자면, 음악은 언제부터 좋아했나요?
좋아한 건, 초등학교 때부터. 저희 세대는… 저희 세대라고 하기에는 아직 젊기는 한데,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CD가 보편화되지 않을 때였어요. 클래식 앨범 같은 건 CD로 많이들 사는데, 팝이나 가요는 다 테이프로 들을 때였죠. 또 어려서 돈도 없고 하니까 라디오를 많이 들었어요. ‘더블데크’로 된 라디오 아시죠? 거기에 120분짜리 공 테이프를 넣고 듣다가, 좋은 음악이 나오면 재빨리 눌러서 녹음을 하곤 했죠.(웃음) 그런 식으로 찾아 들을 만큼 음악을 되게 좋아했어요. 또,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여러 가지 음악을 많이 들려주셨어요. 음악을 하시는 분은 아닌데, 굉장히 좋아하셨거든요. 그 당시 마루에서 흘려 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던 기억이 나요. 음악 소리에 잠에서 깬 거죠. 클래식도 많이 나오고,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등의 팝 음악도 많이 흘렀고요.

들려주셨다는 게, “이거 한 번 들어봐라”가 아니라 집안에 자연스럽게 흐른 거군요.
아빠가 아침에 일어나면 음악부터 트셨어요.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게 된 거죠. 또 지금은 인터넷이 굉장히 보편화 돼서 가사를 보는 게 어렵지 않잖아요. 그런데 당시엔 가사를 볼 수 있는 통로가 많지 않았어요. 앨범을 사야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서점이나 문방구 앞에서 파는, 왜…….

피스 악보?
네, 피스 악보!(웃음) 노란색으로 된 피스 악보 아시죠? 그게 400~500원 이랬는데, 그 당시엔 그것도 큰돈이었어요. 그래서 동네를 막 돌아다니면서 훼밀리주스 빈 병 하나 주워서 슈퍼마켓에 100원 주고 팔고, 사이다 빈 병 가져다가 50원에 팔고 그랬어요. 여기에 아빠 구두 닦은 대가로 받은 몇 백원을 더해서 피스 악보를 산거죠. 그렇게 가사가 너무 궁금해서 어렵게 구했는데, 그게 또 영어 가사일 때가 많았어요. 예를 들면 제가 5, 6학년 때 ‘보이즈 투 맨(Boyz II Men)’이 굉장히 인기였거든요?

I`ll make love to you~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주책 -_-)
네.(웃음) TLC도 인기가 많을 때였고요. 너무 따라 부르고 싶은데 영어는 읽을 줄 모르고, 한글로 나온 건 없고. 그래서 계속 들으면서 한글로 받아 적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따라 부르고 했던 기억이 나요. 또 형이 중학교 때부터 록음악을 듣기 시작했어요. 형이 있는 동생들은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형이 하는 건 다 멋져 보이거든요. 다 따라 하고 싶고. 그래서 형이 없을 때 몰래 형 방에 가서 음악을 듣다가, 저는 아예 음악 쪽으로 빠진 거예요. 형은 그러다가 말았고요.

단대부고 ‘각시탈’ 출신이었다고요. 주위 사람들이 얘기하길, ‘각시탈’이 굉장히 유명했다고.
어떻게 주위에서 그걸 아세요? (웃음) ‘각시탈’이라는 스쿨 밴드가 유명했어요. 멤버가 다섯 명이었는데, 저는 보컬이었고요. 어땠냐고요? 마냥 좋았죠.

그런 건 없었나요? 일찍이 주목 받다보면, 안 그러려고 해도 ‘나는 특별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특별하다기 보다는, ‘이제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각시탈’ 같은 경우에는 각 파트를 한 학년에 한 명 밖에 안 뽑아요. 그러니까 16기 보컬은 저 한명인거죠. 3월에 입학해서 3월 말쯤에 오디션을 봤는데, 오디션 형식으로 뭔가를 해 본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붙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죠. 또 당시에만 해도 음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스쿨밴드였기 때문에 의미가 남달랐어요.

선후배 관계가 되게 엄격했을 것 같아요.
어유, 많이 맞았어요. 거의 운동부 수준으로 맞았던 것 같아요.(웃음) 못해도 맞고, 잘 해도 맞고. 그냥 그렇죠, 뭐. 어릴 때니까.(웃음)

그 당시 MBC에서 하는 악동클럽에 출연하셨는데, “록 못하면 안 하겠다”고 오디션 포기하고 나간 게 재욱씨 맞죠?
그것도! (웃음) 이게 인터뷰에서는 처음 하는 얘기인데, 거기에 대해 물어 보시는 분이 없었거든요. 왜, 보통 밴드가 사고를 많이 치잖아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저희도 어떤 일로 선생님들에게 찍혀서 ‘각시탈’을 없앤다는 얘기가 나왔었어요. 그래서 “아, 이거 큰일났구나” 하는 찰나에 학교에 MBC <악동클럽>으로부터 ‘이런 프로가 있으니까 한 두명 추천해서 내 보네주세요’라는 오퍼가 들어온 거예요. 그랬더니 학교에서 “밴드에서 노래를 하는 게 너니까 네가 학교를 위해 뭔가를 하면, ‘각시탈’을 안 없앨 수도 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약간 반 협박이었죠.(웃음)

하고 싶어서 나간 게 아니군요.
네. ‘각시탈’ 살리자고.(웃음) 제가 1차에서 기권을 했는데, 심사위원 분들이 되게 어이없어 했었어요. 그 때 이휘재씨, 김정민씨, 김형석씨가 계셨는데, 정말 어처구니 없으셨을 거예요. “그럼 왜 왔어요?”라는 질문에 “그러게요”라는 답이나 하고. (웃음)

오디션은 재미는 있었나요?
에이~ 싫었어요, 저는.

정말 총대를 멘 거군요.
그 당시가 제가 모델 일을 시작할 때였어요. 방송국 작가 분들이 제가 모델 일을 하고 하니까. 얘는 뭔가 이야깃거리로 쓸 만하겠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그래서 되게 잘 해 주셨어요, 저에게. 그런데 제가 1차 오디션 붙고 나서 2차에 안 나가겠다고 기권을 하니까 그렇게 잘 해 주시던 분들 태도가 갑자기 확 바뀌는 거예요.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악역 처럼요. ‘이게 연예계구나’ 하면서, 멍했죠.

일찍이 재미있는 경험을 하셨네요. 모델은 잡지 모델이었나요?
네. 그땐 잡지 밖에 안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남자 모델들이 쇼에 서려면 굉장히 마초적이고 남성적인. 예를 들면 ‘돌체 앤 가바나’ 모델 같은 스타일이어야 했어요. 중성적이라든가 스키니한 남자 모델이 쇼에 서는 일이 거의 없을 때였죠.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쇼를 하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아까 전공 얘기가 나왔는데, 서울예대 실음과가 아시는 분들은 아시지만 경쟁률이 엄청나잖아요. 정말 실력 있는 친구들이 모였을 텐데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대학을 꼭 가야되나’하는 생각도 많았는데, 만약 간다면, 꼭 서울예대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른 곳은 아예 시험도 안 봤고요. 그곳에 가면 음악 공부 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제 안에 있었는데, 정말 운 좋게 한 번에 붙은 거죠. 02학번으로.

‘디어 클라우드(Dear Cloud)’도 02학번 출신이 모인 밴드 아닌가요?
맞아요. '디어 클라우드'와는 개인적으로도 친해요. 그리고 지금 활동하는 친구 중에 02학번이 많아요. ‘메이트(MATE)’의 헌일이. 그리고 헌일이가 전에 했던 ‘브레맨’이라는 밴드가 있는데, 그 멤버들도 다 저희 동기였고요. 또 동기 중에 누가 있지? 작곡가로 활동하는 친구들도 많고. 아, 주연이. 임주연도 있고.

혹시 그 때 장윤주씨도 학교에서 만났었나요? 임주연씨가 예전에 PAPER에서 인터뷰 한 적이 있는데, 그 시기에 장윤주씨와 실음과 수업을 함께 들었다고 해서요.
윤주누나는 영화과였는데, 저희과 수업을 청강했었어요. 실음과 수업을 청강하러 오는 학생이 거의 없는데다가, 윤주 누나는 누구나가 알아보는 톱모델이었으니 신선했죠. 또 누나가 ‘리듬 앙상블’이라고 해서 어떻게 보면 가장 듣기 어려운 강의를 들으러왔어요. 만약 이번 주가 ‘스팅’이다! 그러면 ‘스팅’ 곡 중에 하나를 카피 해 와서 조별로 풀 연주를 하는 강의였죠. 거기에서 누나가 노래를 했는데, 저희 입장에서는 ‘웅성웅성’ 거렸죠. “장윤주인데? 정말 장윤주인데?” 이러면서(웃음). 그 때 처음 누나를 만났는데, 그러고 보니 알게 된지 오래 됐네요.

지금 같은 소속사죠?
인연이 깊죠.

재욱씨가 기타 치는 건 봤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또 있나요?
피아노를 조금 치는데 누구 앞에서 연주 할 수준은 안 되고요, 그나마 기타를 조금 하죠. 그리고 저는 노래보다 기타가 더 좋아요.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노래를 되게 좋아했는데, 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노래에서 재미는 별로 못 느꼈어요.

왜, 좋았던 노래에 흥미를 잃었을까요?
기타나 작곡에 관심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그 쪽에 더 열중했던 것 같아요. ‘월러스’같은 경우는 이 멤버로 밴드는 해야 하고, 누군가는 노래를 해야 하니까 제가 보컬을 하게 된 것뿐이고요.

서울예대 외에는 생각 한 곳이 없었다고 했는데, 학교에 가서 기대만큼 충족이 됐나요?
안 됐어요.

왜죠?
저는 기본적으로 록 음악을 좋아해요. 그런데 학교 분위기도 그렇고 커리큘럼도 그렇고 흑인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펀치’보다 ‘그루브’를 좋아하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보컬도 흑인스타일이 대다수였고. 학교 분위기가 그렇다보니까 저같이 록을 좋아하면 약간 특이한 애라는 인상을 줬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약간 아웃사이더가 되더라고요.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했는데, 그런 부분이 혼란스러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복학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엄마에게 졸업장도 안겨줘야 할 것 같고, 더럽게 비싼 등록금도 아까웠기에 복학을 했죠.(웃음) 물론 얻은 것도 있죠. 특히 친구들을 만난 게. 학교에 가면 정말 음악에 미친 사람들 밖에 없으니까, 하루 종일 그런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있잖아요. 음악 얘기를 하고, 자극도 받고 그게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아직 장르가 나왔다고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사람들이 ‘월러스’의 음악을 어떻게 들어줬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게 있나요?
없어요. 음악 뿐 만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 다 그런 것 같아요. (라이타를 내밀며) 예를 들어서 라이타를 이렇게 줬다고 쳐요. 나는 윗면을 보여 주고 싶어서 위를 보여줬는데, 사람에 따라 측면을 보는 사람이 있고, 뒤쪽을 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결국 제가 말하고 싶은 것, 제가 표현하고 싶은 걸 온전하게 내 보내는 건 제 일이지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각자의 몫인 거죠. 거기에서 똑같은 반응을 바라고 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봐요. 물론 제가 원하는 걸 똑바로 봐 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모든 사람들을 다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아요. 알아서 하겠죠.

욕심이 없다는 표현은 안 맞는 것 같고, 뭐라고 해야 하나?
오만 한 거죠! (웃음)

(웃음) 록을 좋아한다니, 작년에 ‘지산밸리록페스티벌’이나, ‘펜타포트록페스티벌’에 갔을 것 같네요.
지산 갔었어요. 제가 ‘오아시스(Oasis)’를 워낙 좋아해서. 지산에 ‘오아시스’가 왔었잖아요.

마침 지산을 거의 마지막으로 ‘오아시스’가 해체를 했는데, 다행히 보셨군요.
네. 작년에 ‘오아시스’를 두 번 봤어요. 4월 내한 공연 때 봤고, 지산 때 봤고. 거의 뭐 광기였죠. 무대 위의 악동들. 저 나이에도 저렇게 에너지가 넘칠 수 있다니, 놀라웠어요.

해체 소식 듣고 아쉬웠겠어요.
뭐, 할 때 됐죠. (좌중 폭소)

‘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와 노암 갤리거가 형제잖아요. 그런데 형제끼리의 ‘용쟁호투’로 결국 해체했는데, ‘월러스’도 형제는 아니지만, 부딪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없어요.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서로를 너무 오래보고, 너무 잘 알아서 그런지 상대가 싫어할 만한 부분은 아예 안 건드리는 거죠. 분명 작업을 하다보면 부딪치는 부분이 생기는데, 그것들을 유하게 넘기는 방법을 서로가 터득한 것 같아요.

일본에서 자랐다고 들었는데, 일본에는 언제 가신 건가요?
태어나자마자 바로 가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있었어요. 아버지가 신문기자셨어요. 해외 특파원으로 동경으로 가시게 돼서 전 가족이 옮긴 거죠. 워낙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사회에 살았다기보다는, 가족이 저에게는 사회였고, 세상이었죠. 그런데 당시만 해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되게 심했었어요. 제 성격적인 문제도 있는데, 왜냐하면 형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아무튼 저는 7년을 살면서 친구가 한 명 밖에 없었어요. 한국말을 할 줄 모르고, 일본 말 밖에 못 했는데도 한국 이름이고 하니까 차별을 받은 거죠. 그런데 왜 어린아이들이 더 잔인하잖아요. 어떤 행동이 상대에게 얼마만큼의 상처를 주는지에 대한 게 정립이 안 서 있는 나이들이다 보니 심한 짓도 많이 당했어요. 그런데 그게 슬프다거나, 거기에서 성격이 어두워졌다거나 한 것 보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족 이외의 타인이 나에게 잘 해 주는 건, 이상한 거라는 생각을 하게 돼 버린 거죠.

당시의 기억이 어떤 식으로든 재욱씨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은데.
모르겠어요. 영향을 줬는지, 아닌지는. 그런데 저는 일본을 좋아해요. 아까 말씀드렸듯 당시에는 친구가 한 명 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일본 친구들이 되게 많아요. 일본가면 그 친구들 집에서 자기도 하고 그래요.

일본에서 온 후, 긴 적응시간이 필요했겠네요.
어렸을 때여서 크게 문제될 건 없었는데, 언어적인 부분이 답답했죠. 다른 애들이 산수 공부하고 그럴 때, 저는 ‘가나다라마바사’를 배우고 있었으니. 그런데 신기했던 건, 한국에 왔을 때 아이들이 너무 잘 해 줬어요. 제가 약간 호기심의 대상이 된 거죠. 같은 한국 사람이긴 한데 한국말은 할 줄 모르고, 또 우리 집에 놀러왔더니 당시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퀄리티 높은 장난감들이 많고.(웃음) 애들이 “오늘 수업 끝나고 너희 집 놀러가도 돼?” 라고 물어보면, 놀랐던 기억이 나요. ‘얘들이 나한테 왜 이러지?’ 하면서 그들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밝아진 거죠. 그 때도 지금도 친구들이 집에 참 많이 놀러 와요.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시나요? 혼자 있는 시간도 좋아하실 것 같아 보이거든요.
그 차이가 되게 심해요. 그런 거 있잖아요. 한참 나가서 놀고 사람들 만나는 시기가 있고, 아무도 보기 싫어서 집에서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고. 이게 자꾸 바뀌는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고. 어떨 때 보면 ‘내가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사람에게 기대는구나’, 생각을 하다가도 어떨 때는 “에이씨, 다 필요 없어!” 이러고. (웃음)

사람에게 상처 받아 본 기억이 있나요?
없다고는 말 못하죠. 연애를 하면서 받은 적도 있고, 소소한 만남에서 받은 적도 있고. 그런데 기억에 남을 만한 어떤 큰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사실, 연기자로 먼저 알려졌지만. 10년 전쯤의 김재욱은 ‘만약 내가 연예계 활동을 한다면 연기자보다 가수 쪽 일거다’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각시탈’ 활동을 할 때 제의가 왔었어요. 가수 해 보지 않겠냐는. 그런데 그 쪽에서 원했던 건, 솔로로 나와서 발라드를 부르는 포맷이었어요. 그런 쪽으로 저를 매니지먼트 하고 싶어 했죠. 그런데 저는 그 당시에도 무조건 밴드. 밴드가 아니면 음악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밴드라는 포맷을 저는 평생 못 버릴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같이 하는 게 재밌어요. 감성적인 부분도 그렇고, 기술적인 부분도 그렇고, 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지고 있지 못한, 그런 다양한 것들이 만나서 뭔가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게 좋아요. 영화나 드라마 현장도 마찬가지죠.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있고, 그걸 카메라에 담아내는 촬영 감독님이 있고, 조명을 해 주시는 분들이 있고, 그걸 다 이끄시는 감독님이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이 뭔가 하나를 만들어간다는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주관이 뚜렷하신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각을 지금까지도 쭉 유지하는 걸 보면.
아, 그런가요?(웃음)

많은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혹은 주변 환경에 의해서든 변하기도 하는데, 재욱씨 같은 경우엔 크게 흔들리지 않는 인상이에요.
저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다만, 혼자서 살아 갈 수 없으니까. 자기의 생각이라든가 고집만을 가지고 살아가기엔 부딪히는 게 너무 많으니까, 무난하고 유하게 살아가려고 자기가 가진 것들을 바꾸는 거죠. 어른이 된 ‘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안 보여요, 제 눈에는.

그러니까 진짜로 변하는 게 아니라, 상처를 안 받으려고 ‘척’을 한다는 건가요?
그렇죠. 후에 학습한 것들이 익숙해진 것뿐이지, 본질적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천성이라든가 이런 게. 궁지에 몰리는 사람을 보면, 장난감을 사달라고 길거리에 앉아 우는 아이들 같은 면이 나오잖아요.

연기 얘기를 좀 해 봐요. 첫 작품이 <네 멋대로 해라>죠? <네 멋대로 해라>는 지금도 많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품드라마로 기억되고 있어요. 재욱씨에게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요?
저에게는 굉장히 힘들었던 작품이에요. 제가 음악 공부를 해서인지, 감독님이 인디밴드 베이시스트 역할을 맡기셨어요. 저와 극 속의 인물이 가진 공통점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싶으셨나 봐요. 그런데 저는 연기를 하는 것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처음이어서 압박이 심했어요. ‘연기는 진짜 내가 할 일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했죠.

그 이후에 다시 연기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셨어요.
<네 멋대로 해라> 이후에 모든 걸 다 내려놓고, 학교만 다녔어요. 또, 예대 실음과가 다른 걸 하면서 다니기가 힘들거든요. 그렇게 다니다가, 졸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시대 분위기도 잘 탔죠. 슬림한 스타일의 모델들이 나오기 시작할 때였거든요. 그러면서 연기도 다시 하게 되고. 또 학교 다니면서, 그렇게 힘들었던 연기인데 눈길이 가는 거예요. ‘공부 제대로 해서 다시 해 볼까?’ 하는 찰나에 연기를 제대로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 한 분을 만났어요. 그 분을 만난 게 정말 행운이었죠. 어영부영 테크닉만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을 만났다면 연기를 다시 시작 못했을 것 같아요.

멘토가 있으셨군요. 재욱씨의 인지도를 알린 건, <커프>예요. 얼마 전에 공유씨 제대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났나 새삼스러워서.
본인은 아니래요. “아, 형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요?” 했더니, “야, 그게 너한테나 빠르지~”이러더라고요.(웃음)

공유씨가 군에 있을 때, 국방 라디오를 진행 하셨죠?
네. 저도 그 방송 게스트로 나간 적이 있어요. 또 형이 제대하기 두 달 전인가? 장난으로 전화를 해서 스피드퀴즈를 했어요. “어디 사는 누구시죠?”, “네. 서울에 사는 김씨입니다” 이런 식으로 장난을 쳤죠. (웃음)

(웃음) <커프> 찍을 때, 공유씨의 김재욱을 향한 사랑이 각별했다고요.
엄청 친했어요. 비단 형뿐 아니라, 모든 스텝들이 그랬죠. 현장에 가는 게 너무 즐거운 거예요. 심지어 집에 들어는 걸 싫어했어요, 다들. 그래서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에는 이게 인기를 끌 작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김창완 선생님처럼 연기를 오래 하신 분들도 “이런 현장 없다”고, “이렇게 화기애애하고, 가족 같은 현장이 없는데 만난 건 행운”이라고 하시고. 2007년 여름을 기억했을 때, <커프>이 있다는 건, 저에게 큰 재산이죠.

<커프> 이윤정 PD님은 배우들에게 연기를 편히 맡기는 연출가로 유명하시잖아요.
네. 울타리를 만들어 주시고, 거기에다 그냥 집어 던지시는 거죠. 너네끼리 놀아라. 거기에서 재미있는 걸 잡아내세요.

그럼 촬영 할 때, 재욱씨 의견도 많이 반영 됐겠네요.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서 캐릭터를 만들어 갔는데, 리허설 할 때, “선기 여기서 어떻게 할 거예요?” 물어보세요. 그런데 그 때는 아이디어가 너무 잘 튀어나오는 거예요. 모든 배우들이 “이 씬에서 이렇게 하면 재미있겠다”라는 이야기를 계속 주고받았죠. 애드립도 많았어요. 김창완 선배님 막 코 파시고.(웃음) 그런 게 다 즉석에서 나온 거예요.

이윤정 PD님이 풀어 놓는 스타일이라면, 그 다음에 만난 <앤티크> 민규동 감독님은 어땠나요?
매우 달랐죠.(웃음)

이 웃음의 의미는?(웃음)
각자의 장점을 있으신데, 민규동 감독님 같은 경우엔 굉장히 섬세하시죠. 저희가 연기한 영화 속 진혁(주지훈)과 선우(김재욱)가 3D 캐릭터라고 해야 하나? 워낙 특별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라 감정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은 캐릭터들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식이셨어요. 컷이 나고 재촬영을 하기 전에, 감독님이 “다시 한 번 가보자”라고 얘기를 하시는데, 누가 봐도 시나리오에서 전반적으로 나와야 하는 감정이 빨강이에요. 그러면 저희는 빨강에 집중을 하잖아요. 그런데 민규동 감독님은 “빨간색을 표현하되, 겉에는 노란색이 보였으면 좋겠고, 전체적으로는 보라색의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어” 이런 식으로 말씀하세요. 그러면 저희 입장에서는 미치는 거죠.(좌중 폭소)

와~ 정말 어려웠겠다. 그런 현학적인 설명을.
미치는 거예요. 정확한 디렉션만 요구할 경우, 배우가 감독의 인형이 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싫기는 한데, 어떤 경우에는 정확한 디렉션이 있었으면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너무 힘드니까. 그런데 거의 모든 설명을 그런 식으로 하셔서, 참.(웃음) 그러니까 감독님 개인적으로도 정확한 디렉션을 주기가 조심스러웠던 거예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그렇게 밖에 안 할 거잖아요”라고. 저희는 돌아버리는 거죠, 정말! 그래서 별 짓을 다 했어요. 숙소에서 다 함께 지냈는데, (주)지훈이 형, (유)아인이, (최)지호형 다 함께 모여서 서로에 대한 캐릭터 얘기를 계속 하고. 제가 진혁이 대사를 해 보고, 지훈이 형이 선우 대사를 해 보고. 거기서 또 괜찮은 걸 캐치해서 해 보고. 진짜 되게 힘들었어요.

특히나 <앤티크>에서 연기한 게이 선우 같은 경우엔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좋았던 게, 보통 게이라면 여성적인 느낌을 많이 살리는 경우가 많은데, 선우 같은 경우엔 오히려 남성적인 느낌이 강한. 그러니까 평상시의 일반 남성 같은 느낌으로 연기한 게 오히려 더 현실감 있게 느껴져서 좋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선우같은 경우엔 레퍼런스가 아예 없었어요. 기존에 황정민 선배님이나 몇 분이 게이 역을 하시긴 했는데, 선우 같은 캐릭터는 아니었기 때문에 참조할 만할 게 없었죠. 그래서 더 욕심이 났던 것 같아요. ‘리스크’가 있기는 한데, 남들이 안 해 본 어떤 영역을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감이 컸거든요. 또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동성애의 코드는 다들 너무 어둡잖아요.

어둡거나, 너무 가볍거나.
네. 둘 중에 하나였죠. 그래서 그게 아닌 걸 만들고 싶었어요. 감독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옆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상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현실적인 인물을 만들고 싶었어요. 물론 그러기에는 ‘마성의 게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수식어가 있기는 했지만요. 이태원 가면 있을 법한 친구였죠.(웃음)

아, 이태원 가 보셨죠?
영화 촬영 들어가기 전에요.

추파 던지는 남자들도 많았을 것 같아요
전에 <놀러와> 방송 나가서 얘기 했었는데, 게이 분들이 어떻게 노는지 궁금해서 게이 클럽에 갔었어요. 갔는데, 백인 남성분이랑 동양 남성분이 아주 뜨겁게 키스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이 공간에서는 저게 특이한 게 아니구나’ 생각하며 같이 간 지인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죠. 그런데 누가 제 엉덩이를 꽉 잡고 지나가는 거예요. 보니까 아까 키스하고 있던 동양인이더라고요. 저를 보면서 윙크를 딱 하고 가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여자한테도 그런 대시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되게 신선했죠. 또, 당시 게이 분들을 만나서 얘기를 되게 많이 했어요.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또 패션계에 워낙 많으시기 때문에.

말이 나와서 하는데, 패션계에 많다는 게 알려져 있는 상황이라 오해를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을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그런 오해를 많이 받고 있어요.(웃음) 그런데 뭐, <앤티크>가 제 유작이 되지는 않을 거니까.(웃음) 천천히 그런 인식이 바뀌어 가겠죠. 생각했던 것 보다 사람들이 저를 “야~ 마성! 마성!” 이렇게 기억하시더라고요.

‘마성’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사람을 속이거나 현혹하는 악마와 같은 성질’이라고 돼 있더라고요. 선우의 경우 후자의 성질이 강한 인물이었는데, 김재욱 개인에게 마성적인 부분을 찾으라면 뭐가 있을까요?
마성적인 부분이요? (웃음) 흠…없는 것 같은데.

그럼, ‘매력’이라는 말로 폭을 넓히죠.
글쎄요. 자기 입으로 자기 매력을 말한다는 게. 하하하. 워낙에 다들 다르니까. (제원을 보며) 형님이 지금 보시는 저와, 기자님이 보시는 저와, 또 내 주변 사람들이 보는 내가 다 다르잖아요.

그렇다면, 주변 사람들이 재욱씨에 대한 매력을 얘기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그 중에서 수긍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아~ 너무 힘들다. (좌중 폭소) 저는 제 얘기를 제 입으로 하는 걸 되게 싫어해요. 그러니까 “나는 약간 그런 스타일이잖아” 그런 식으로 얘기 하는 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면 제가 말하죠. “뭐가 그런 스타일이야. 그런 건 네가 판단하는 게 아니야”라고.

그러고 보니 <앤티크> 이후에 사극 <바람의 나라>에 출연하면서 이미지 변신을 꽤하셨네요. 조금 의외의 선택이기도 했는데.
그 얘기를 되게 많이 들었어요. 심지어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해서 “너의 그 때 선택은 옳지 않았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약간 반반인데요, 제 입장에서는 당시 그 역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네 멋대로 해라>, <달자의 봄>, <커프>, <앤티크>를 거치면서 제 또래 배우들하고 밖에 부딪히지 않았거든요. 연기를 오래 한 선배님들과 호흡을 맞춰보고 싶었어요. 또 감정을 안으로 삭이는 캐릭터가 있고, 발산하는 캐릭터가 있는데, 저는 삭이는 캐릭터를 많이 했기 때문에 발산하는 역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빨강이면 빨강만 딱 보여줄 수 있는. 어떻게 보면 2차원 적인 단순한 캐릭터. 그런 걸 해 보고 싶어서 <바람의 나라>를 하게 된 거죠.

그 선택이 실수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스스로는 갈증이 채워지셨나요?
저는 너무 좋았어요. 이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는 앞으로 제가 뭘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지금 바로 판단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럼 된 거네요.(웃음) 그런데 <바람의 나라> 이후에 연기 재충전 시간이 길어지고 있어요. 의도한 건가요, 아니면 작품을 못 만나서인가요?
지금 정확히 1년을 쉬었어요. 그 동안 작품이 안 들어온 건 아니에요. 대중적으로 굉장히 성공한 작품도 있었죠. 그런데 그게, 제 것 같지가 않은 거 있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벌써부터 제 색깔을 정하고 특화된 배우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다만 대중에게 어필을 할 수 있다거나, 돈을 벌 수 있다거나, 이 역할 잘만 하면 광고가 많이 들어오겠다거나 하는 그런 부분만 가지고 선택을 하기엔 조금 망설여지는 작품들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1년이 지났네요. 조만간 일본에서 모바일 형식의 드라마를 하나 들어가긴 해요. 한국에서는 아직 확정 된 게 없고 음악으로 먼저 다가갈 것 같아요. 제대로 뭔가를 보여 드려야줘. ‘GMF’ 공연 한 번 하고 끝낼 수는 없으니까.

지금 20대의 김재욱도, 30대의 김재욱도 얼핏 보이는데, 40대의 김재욱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잘 그려지지 않네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딱히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런 환경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사적인 부분도 그렇고, 공적이 부분도 그렇고.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창작 활동도 계속 이어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음악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김재욱과, 연기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김재욱에 차이가 있나요?
같은데 아까 말씀 드린 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이 중요한 것 같아요. 뭐가 더 좋다는 건 없어요. 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 할 수는 있겠죠, 음악이. 뭔가 제가 책임자로서 가져 갈 수 있는 부분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음악이 되게 1차적이잖아요. 글이나 연기는 눈을 감으면 안 보이는데, 음악은 귀를 틀어막지 않는 이상 들을 수밖에 없는 거니까. 그러니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생활에 접해 있는 가장 1차적인 게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또 음악은 그 노래를 들었던 그 당시의 기운이라든가, 냄새라든가 그런 걸 그냥 확 기억나게 하잖아요. 그게 정말 놀라운 힘인 것 같아요.

재욱씨에게도 그런 음악 있나요? 추억을 환기 시키는 음악, 과거로 데려다 주는 음악.
<앤티크>때, 집에 못 들어가고 한 달 반 정도를 양수리 세트장에서 촬영했어요. 숙소에서 세트장 사이의 거리가 15분 정도 걸렸는데, 세트장, 숙소, 세트장, 숙소 이런 생활이었죠. 그 때 세트장과 숙소를 오가며 듣던 노래가 인본밴드 ‘동경사변’이라고, 시이나 링고라는 여자가 만든 노래였어요. 지금도 그걸 들으면 눈이 소복이 쌓였던 양수리의 새벽길과, 차가운 바람의 냄새와, 창문을 내리고 내뿜었던 담배 연기 이런 게 떠올라요. 이게 음악의 힘이지 않을까 싶어요. 시간이 흘러도 오래 전 그 상황, 그 분위기로 이끌어 주는 그런 게.

인터뷰가 끝날 때 쯤 김재욱은 자신이 오늘 말도 많고, 횡설수설 한 것 같다며 멋쩍어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인터뷰를 할 때 짧게 답하는 바람에 자기를 야속해 하는 기자 분들이 있을 거라는 솔직한 얘기도 들려줬다. 그건 아마 ‘Yes or no’식의 명확한 대답을 원하는 기자들의 의도를 경계한 김재욱만의 방법이었으리라. 그리고 삶의 어떤 것도 고정화시키지 않으려는 그만의 삶의 방식이었으리라.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하는, 그리고 틀에 갇히지 않으려 하는 그의 걸음이 멈추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글 - 정시우<siwoorain@hanmail.net> 사진 - 이제원 <finaple@naver.com>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