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카이폴> 리부팅 완료, 본드 아이덴티티 심야영화티켓

지난 7월 런던올림픽 개막식. ‘여왕 수행 미션’을 하달 받은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하늘에서 낙하’(skyfall)하는 세레모니를 선보였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히트상품이라 할 만 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007 시리즈가 영국의 자부심으로 성장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거두절미하고, <007스카이폴>은 50주년 기념작이라는 사실에 누를 끼치지 않는, 심지어 품격까지 갖춘 근사한 영화다. 작전명으로 표현하자면, ‘온고지신’쯤 될까. 복고로의 회귀를 선택한 샘 멘데스는 그 속에서 미래로 가는 해답을 찾는다. 007 시리즈는 샘 멘데스로부터 다시 쓰여질지 모른다.

My name's Bond, James Bond. 자신을 소개하는 제임스 본드의 영국식 발음은 여전히 섹시하다. 매력적인 여자라면 일단 침대에 쓰러뜨리고야 마는 플레이보이 기질도 살아있다.(엄밀히 말하면 첫사랑 베스퍼(에바 그린)로 인해 순정남이 됐던 본드의 바람기가 되살아났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본드의 한쪽 가슴에 총알을 명중시키며 그를 폭포 아래로 추락시키지만, 주인공은 절체절명의 순간 “짠” 하고 나타나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MI6 본부가 ‘MI6 출신 악당’ 라울 실바(하비에르 바르뎀)에 의해 파괴되고, 수장 M(주디 덴치)이 사퇴 압력을 받자 본드가 돌아온다. He's back!

<스카이폴>이 언론에 공개된 후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부활’이다. 하지만 부활이라는 단어를 <스카이폴>에만 한정짓는 건 온당치 못하다. 부활의 전조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더블오(00) 살인면허를 부여받은 <카지노 로얄>(2006년)부터 시작됐으니 말이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선배 ‘007’ 피어스 브로스넌이 만들어놓은 슈퍼히어로적 007 이미지를 부수고 본드 캐릭터에 리얼리티를 입혔다. 조롱과 패러디의 대상으로 전락해가던 본드가 고독하면서도 강인한 남자의 상징으로 재평가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러니 <스카이폴>의 부활은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2008년)의 기반 밑에서 이룩됐다고 보는 편이 맞다. <스카이폴>이 트릴로지(3부작)의 완성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작 <스카이폴>의 흥미로운 점은 자기검증에 있다. 자기검증은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뿐 아니라, 오늘날의 수많은 첩보영화들이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다. 냉전 이후 첩보영화들은 주적을 잃었다. 국경 없는 테러리스트들을 적으로 삼으며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 하려 했지만, 요원들이 싸워야 할 명분은 냉전 시대에 비해 한없이 빈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첩보영화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에 몰두했다. ‘왜’ 계속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답은 내놓지 못한 채. 국가로부터 외면 받는 스파이(<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이단 헌트,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 등)들이 늘어난 것 역시, 변화하는 국제정세에서 스파이가 필요한 이유를 납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카이폴>은 스스로 묻는다. “우리가 지금 필요한가!” 샘 멘데스는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를 인용해 논란을 정면 돌파한다. 007 시리즈가 왜 지속돼야 하는지, 007이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영화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가치를 영리하게 증명해낸다.

<스카이폴>에 대한 호불호가 나뉜다면, 가장 큰 원인은 영화가 액션을 운용하는 방법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카이폴>의 액션은 기존 시리즈보다 상대적으로 적은데, 본드 특유의 유머까지 거세된 덕에 무겁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넥타이 고쳐 매는 본드의 여유는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고된 일정에 피로한 노동자가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당신이 원하는 본드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이폴>은 단순 오락 영화 이상의 야심을 지닌 밀도 높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적어진 액션의 빈자리를 심리전으로 빼곡히 채운다. 자신을 버린 M을 향한 복수가 간절한 실바와 M에게 버림 아닌 버림을 받았던 본드,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M. 이들 사이에 형성된 아슬아슬한 삼각관계는 웬만한 치정보다 애잔한 구석이 있다. 본드의 고향 스코틀랜드 저택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결전 시퀀스에서는 고전 영화의 향취마저 느껴진다. 본드의 트라우마가 형성된 장소에서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상징하는바 역시 각별하다.

본드 걸에 대한 기대는 애당초 접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본드 걸을 맡은 배우 스스로도 민망해 할 만큼 분량과 존재감이 없다. 사실 <스카이폴>의 진정한 본드 걸은 M역의 주디 덴치로 봐야 마땅하다. 7번째 007 시리즈 출연인 그녀는 사건의 주체이자, 관찰자인 동시에 다음 세대로 가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올드팬들을 위해 준비된 선물은 Q와 머니 페이의 컴백, 그리고 <골드핑거>에 쓰였던 본드카 ‘애스턴 마틴 DB5’의 등장이다.(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는지 눈여겨보라.) <스카이폴>을 논하는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건, 오프닝 크레딧이다. 아델의 ‘skyfall’에 맞춰 흐르는 영상은 CD로 구워 소장하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다. 한마디로 ‘죽여준다.’ 오프닝 크레딧 하나가 영화의 품격 향상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귀한 사례로 남을게다.


덧글

  • Gony 2012/10/29 13:51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애스턴 마틴 DB5는 선더볼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니라 그 전작인 골드핑거(64년)에서 등장하지요. 허긴 워낙 오래 되고 많이 나와서요. ㅎㅎ
  • 루시드레인 2012/10/29 20:32 #

    네.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깜장콩 2012/10/31 15:40 # 답글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하는 본드는 웬지 본드 같지가 않고 무서워서 좀 어색하더군요 ㅎㅎ
  • 붉은비 2012/10/31 17:50 # 삭제 답글

    진정 섹시한 영국식 영어를 보여줬던 건 랄프 파인즈...
    남유럽 사투리가 잔뜩 섞였음에도 그 울림이 풍부해 실로 매혹적이었던 바르뎀...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 궁중 영어가 이러했을까 싶은 주디 덴치...

    이 세 명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있더군요.
    중간중간 아예 눈을 감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쩍벌남 포즈가 이 영화의 유일한 결점이라고 생각합니다...-_-;
  • 루시드레인 2012/11/01 10:29 #

    영국배우들 발음이 오묘하면서도 섹시한 면이 있죠.
    주디 덴치 목소리는 개인적으로도 좋아해요. ^^
  • 잠본이 2012/11/03 17:21 # 답글

    열차에 올라타서 커프스 단추 매만지는 부분에서는 그래도 좀 여유가 엿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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